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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 21:14 분류없음


(『바람의 사생활』 / 2006 / 창비)

 

나에겐 쉰이 넘은 형이 하나 있다
그가 사촌인지 육촌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모른다

태백 어디쯤에서, 봉화 어디쯤에서 돌아갈 차비가 없다며
돈을 부치라고 하면 나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형에게
삼만원도 부치고 오만원도 부친다

돌아와서도 나에게 전화 한통 하지 않는 형에게
또 아주 먼 곳에서 돈이 떨어졌다며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는 그가 관계인지 높이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잘 모른다

단지 그가 더 멀리 먼 곳으로 갔으면 하고 바랄 뿐
그래서 오만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십만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며
그의 갈라진 목소리에 대답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느 먼 바닷가에서 행려병자 되어 있다고
누군가 연락해왔을 땐 그의 낡은 지갑 속에
내 전화번호 적힌 오래된 종이가 있더라는 것
종이 뒤에는 내게서 받은 돈과 날짜 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더라는 것

어수룩하게 그를 데리러 가는 나는 도착하지도 않아
그에게 종아리이거나 두툼한 옷이거나
그도 아니면 겹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할 뿐
어디 더 더 먼 곳에서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했으면 하고
자꾸 바라고 또 바랄 뿐


 

당신이라는 제국 (『바람의 사생활』 / 2006 / 창비)

이 계절 몇 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
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
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


 

생활에게

일하러 나가면서 절반의 나를 집에 놔두고 간다
집에 있으면 해악이 없으며
민첩하지 않아도 되니
그것은 다행한 일

나는 집에 있으면서 절반의 나를 내보낸다
밭에 내보내기도 하고 비행기를 태우기도 하고
먼 데로 장가를 보내기도 한다
반죽만큼 절반을 뚝 떼어내 살다보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도 없으며

그리하여 더군다나 아무것도 아니라면 좀 살만하지 않을까
그 중에서도 살아가는 힘을 구하는 것은
당신도 아니고 누구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기억도 아닌
그저 애를 쓰는 것뿐이어서
단지 그뿐이어서 앉은 자리가 축축해지는 줄도 모르는 건 아닌가

하나 정작 내가 사는 일이 쥐나 쫓는 일은 아닌가 한다
절반으로 나눠 살기 어려울 때는
내가 하나가 아니라 내가 둘이었음 싶을 때도 있다
둘이라면 구석지로 몰고 몰아 붙잡을 수도 있을 터이니


 

무늬들 (『바람의 사생활』 / 2006 / 창비)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여
그 아름다움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 몸을 향해 깊숙이 꽂은 긴 칼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이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사랑의 역사 (『바람의 사생활』 / 2006 / 창비)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렷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친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쳤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별의 각질 (『바람의 사생활』 / 2006 / 창비)

애초 내가 맡은 일은 벽에 그려진 그림의 원본을 추적하여 도화지에 옮겨 그리는 일이었다부러진 이 가지 끝에 잎이 달렸을까 이 기와 끝으로 매달린 것이 하늘이었을까 하루 이틀 상상하는 일을 마치고 처음 한 일은 붓으로 벽을 터는 일이었다 벽에다 말을 걸 듯 천천히

도저히 겹쳐지지가 않는 다른 그림이 나왔다 누군가 흰 칠을 해 지우고 다시 그린 것이 아닌가 하여 벽 한 귀퉁이를 분할한 다음 붓으로 다시 열흘을 털었다

연못이 그려져 흐르고 있었다. 다시 다른 구석을 닷새를 터니 악기를 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성지기가, 죽은 물고기가 올려져있는 천칭의 한 쪽 모습도 보였다

흰 칠을 하고 바람이 지나면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지워지면 다시 흰 칠을 하여 그림을 올리고
다시 흰 칠을 하고 그림을 그려 흰 칠과 그림이 누대를 교차하는 동안 강이 불어나고 피가 튀고 폭설이 내려 수천의 별들이 번지고 내밀한 것처럼 밀리고 씻기고 쓸려 말라갔던 벽

벽을 찔러 조심스레 들어내어 박물관으로 옮기면서 육백여 년 동안 그려진 그림이 수십겹
이라는 사실에 미어지는 걸 받치느라 나는 가매지고 무거워진다 책 냄새를 맡는다 살 냄새였던가


 

밤 열두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 2005 / 문학동네)

1
밤 열두시는
혼자 시키는
떡볶이 1/2인분과 순대 1/2인분이다
그것도 다 식은 채로
한 접시에 나란히 나오는 것이다
순대는 고추장에 닿지 않으려고
한사코 한쪽을 지키고 있고
떡볶이는 순대 쪽으로 진물을 흘리고 있다

순대 먼저 먹을지
떡볶이 먼저 먹을지
밤 열두 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2
밤 열두시는
밥 한 공기를 시켜
당신과 내가 나눠 먹는 일이다
그러다 밥 속에서 눈썹이 나오면 눈썹을 떠내어
몰래 식탁 밑으로 숨기는 일이다
당신의 숟가락이 지나간 자리엔
붉은 수술 자국 생겨나고
사과나무 하나 뽑혀나간 것 같은 구덩이는
두 사람이 걸어온 밤길처럼 물컹하다

반찬 묻은 쪽을 먹어야 하지
안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
밤 열두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나비의 겨울  (『바람의 사생활』 / 2006 / 창비)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화초에 물이 흥건하고 밥 지은 냄새 생생하다
사흘 동안 동해 태백 갔다가
제천 들러 이틀 더 있다 왔는데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누군가 내 집에 있다 갔다
나는 허락한 적 없는데 누군가는 내 집에 들어와
허기를 채우고 화초를 안쓰러워하다 갔다

누군가는 내 집에 살다 갔는데
나는 집이 싫어 오래 한데로 떠돌았다
여기서 죽을까 살을까 여러번 기웃거렸다

누군가 다녀간 온기로 보아
어쩌면 둘이거나 셋이었을지도 모를 정겨운 흔적 역력하고
문이 그대로 잠긴 걸 보면
한번 왔다가 한번 갈 줄도 아는 이 분명하다

누군가 내 집에 불을 놓았다
누군가 내 집에서 불을 끄고 아닌 척 그 자리에 다시 얼음을 놓았다
누군가 빈집에서 머리를 풀어 초를 켜고 문고리에 얼굴을 기댔다


 

오래된 사원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 2005 / 문학동네)

나무뿌리가 사원을 감싸고 있다

무서운 기세로 사람 다니는 길마저 막았다

뿌리를 하나씩 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원의 벽돌이 하나씩 무너져내렸다

곧 뿌리 자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오래 걸려 나를 다 치우고 나면 무엇 먼저 무너져내릴 것인가

나는 그것이 두려워 여태 이 벽돌 한 장을 나에게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외면 (『바람의 사생활』 / 2006 / 창비)

받을 돈이 있다는 친구를 따라 기차를 탔다 눈이 내려 철길은 지워지고 없었다

친구가 순대국집으로 들어간 사이 나는 밖에서 눈을 맞았다 무슨 돈이기에 문산까지 받으러 와야 했냐고 묻는 것도 잊었다

친구는 돈이 없다는 사람에게 큰소리를 치는 것 같았다 소주나 한 잔 하고 가자며 친구는 들어오라고 했다

몸이 불편한 사내와 몸이 더 불편한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받으며 불쑥 친구는 그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그들은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고 친구는 그러니 다행이라고 말했던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언 반찬 그릇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흘끔흘끔 부부를 훔쳐볼수록 한기가 몰려와 나는 몸을 돌려 눈 내리는 삼거리 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맞은 사람들은 까칠해 보였으며 헐어 보였다

받지 않겠다는 돈을 한사코 식탁 위에 올려놓고 친구와 그 집을 나섰다 눈 내리는 한적한 길에 서서 나란히 오줌을 누며 애써 먼 곳을 보려 했지만 먼 곳은 보이지 않았다

요란한 눈발 속에서 홍시만한 붉은 무게가 그의 가슴에도 맺혔는지 묻고 싶었다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바람의 사생활』 / 2006 / 창비)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한 날 새들의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는 울음 멎게 술 한잔 부어줄걸 그랬나, 발이 젖어 오래도 멀리도 날지 못하는 새야

지난날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두운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보아라


 

피의 일 (『바람의 사생활』 / 2006 / 창비)

자리를 보고
터를 다져 집을 짓고
마당에 심은 나무가 꽃을 틔워 천지에 떨어뜨리고
세월이 집을 데리고 가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벌판이 되는 일

피의 일

먼 길을 떠나 몸 누일 곳을 찾아
두리번거려 찾은 못에 땀 젖은 옷 벗어 걸고
이곳은 어디쯤일까 하는 현기증으로
이건 누구의 냄새일까 하는 궁리로 잠을 못 이루고
잠시 세월을 데리고 갔다가
애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떠난 곳으로 돌아오는 일

피의 일

당신을 중심으로 돌았던
그 사랑의 경로들이
백년을 죽을 것처럼 살고 다시 백년을 쉬었다가
문득 부닥친 한 목숨에게
뼈가 아프도록 검고 차가운 피를 채워넣는 일


 

저녁 풍경 너머 풍경 (『바람의 사생활』 / 2006 / 창비)

일 마치고 돌아오는 길가 황혼에 눈길을 주다보면 저 멀리 풍경이 강가에 다리 놓는 모습 보입니다

강 저편에서 강 이편으로, 강 이편에서 강 저편으로 서로 각자의 기둥을 놓고 손을 내뻗는 모습에 무작정 속이 아리다가도 그 속도가 아름답기도 하고 장해 보이기도 하여 창자가 다 휘둘립니다

며칠에 한번쯤 통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神)은 자꾸 자리를 만들고 허문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당신들도 지워졌으므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당신은 당신들의 장엄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당신도 목숨 걸고 자본주의의 풍경이 되는 일을 합니까

한 풍경이 등짐을 지고 일 갔다 돌아옵니다

자꾸 먼 데를 보는 습관이 낸 길 위로 사무치게 사무치게 저녁은 옵니다

다녀왔습니다.

posted by 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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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21:39 일기장
맨날 올리는게 이것뿐이군요(.........)


*드래곤 케이브: http://dragcave.net/
 
      
 
 
   
     
 
 

 

 

 
  
먹이 좀 부탁드려요;ㅅ;
 아무거나 주셔도 괜찮답니다~

*드래곤어댑터즈 http://tabiki.dragonadopters.com/
 
 
 
 
 *포켓덱스? 포케덱스?
 

 Warm me up! 을 눌러주세요~

posted by 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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